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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널-맨시티] 자신의 축구철학 대신 현실을 택한 벵거의 승리
병장 서현규 | 2017-04-24 22:26:08 | 1519



"나는 빅클럽들에겐 승리에 대한 책임과 동시에 매력적인 스타일을 통해 승리를 거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어떤 팬이 있다고 하자. 그 팬은 일주일 내내 고된 일을 하며 바쁜 한 주를 보내고 주말 아침에 눈을 떴다. 그가 눈을 뜨는 그 순간에 '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축구팀의 경기가 있는 날이군'이라는 생각을 한다고 치자. 나는 바로 그 순간에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오늘 자기가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러 가서 뭔가 특별한 플레이를 볼 거라는 생각에 행복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이것은 벵거가 자신의 축구 철학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이자, 아스널 내부 기자 존 크로스가 쓴 '아르센 벵거 아스널 인사이드 스토리' 뒤표지에 실려있는 문장이다. 그는 팬들이 즐거운 축구를 볼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즐거워하는 축구를 펼치려면 골을 많이 넣어야 한다. 골을 많이 넣기 위해서라면 끊임없는 공격을 시도해야 하고, 끊임없는 공격을 시도해야 하기 위해선 볼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 벵거가 언급한 '아름다운 축구'와 축구 전술 중 하나로 분류된 '벵거볼'같은 개념이 이와 같은 그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맨시티를 꺾고 대망의 FA컵 결승전에 진출한 어제 경기만은 벵거의 위와 같은 철학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르센 벵거 아스널 인사이드 스토리에 따르면 2005년 맨유와의 경기에서만 자신의 철학을 지키지 않았다고 한다.) 볼 점유율은 34.5%만을 기록했고, 슈팅수, 유효 슈팅수, 패스 성공률, 패스 숫자, 볼 터치수 모든 면에서 맨시티에게 밀렸다. 심지어 패스 숫자는 385대 743으로 대략 2배 정도 차이가 났다.

그만큼 벵거가 승리에 대해 절실했다는 뜻이다. 그의 철학을 또한번 버리면서까지 거둔 승리였기에, 어제 경기는 벵거에게 있어 분명 중요한 날로 기억될 것이다.  

-또다시 백3 아스널과 4-2-3-1 맨시티




이번 경기 양 팀 선발 라인업


아스널은 지난 미들즈브로전과 똑같은 3-4-3 포메이션을 들고 나왔다. 베스트 라인업 11명 모두가 동일했다. 지난주 이 백3 포메이션으로 진땀승을 거뒀기 때문에 맨시티전 라인업에 대한 얘기가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맨시티를 2-1로 격파하는데 성공한 벵거 감독이었다. 

맨시티 역시 선발 라인업 자체는 지난 사우스햄튼전과 바뀐 점이 없었다. 다만 경기 중 전반 22분에 실바가 스털링과 교체됐기 때문에 사실상의 공격 2선 조합은 '사네-데 브루잉-스털링'이었다. 교체 후 데 브루잉이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로 옮겼다. 

-매우 실리적이었던 아스널, 그리고 약점을 노출해도 즉시 커버해낸 수비 라인

이번 경기서 아스널이 노출한 최대 문제점은 전방 압박시 수비 라인과 미드필더 라인 사이의 간격이 매우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전술했듯 벵거는 어젯밤 축구의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자신의 '철학' 대신, 현 상황이 최악이라는 '현실'을 택하며 매우 보수적으로 경기에 임했다. 때문에 백3 포메이션을 택한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시티를 상대하는데 있어 이들에게 전방 압박이란 필수불가결적인 요소였다. 과르디올라 특유의 패싱 게임과 전술. 그리고 이들의 후방에는 리그 최고의 미드필더 투레와 페르난지뉴가 있을뿐더러, 앞 선의 실바, 데 브루잉 같은 선수들에게 볼이 배급되는 것 자체가 수비진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었다. 



아스널의 전방 압박과 그로인해 발생하는 문제점(우), 그리고 그 후의 상황(좌)


아스널이 5-4-1로 전환한 이후, 전방 압박을 위해 2선 선수들까지 전진시킨다면 수비 라인도 간격 유지를 위해 같이 따라 올라와야 했다. 그것이 전방 압박 단계의 포석이다. 하지만 이번 경기 아스널은 그러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최전방에서 아구에로와 나바스, 사네 등이 계속해서 상대 수비 뒷공간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압박을 나선 앞 선의 공격진들은 맨시티 수비 라인과 투레-페르난지뉴 간의 패스 게임에 휘말려 제대로 된 수비를 해내지 못했다. 휘말리면 휘말릴수록 아스널의 미드필더 라인이 전진됐고, 밑선의 수비 라인이 아구에로, 사네, 나바스 등의 라인 브레이킹 시도에 막혀 라인 사이의 간격이 벌어졌다.

과르디올라의 맨시티는 절대 이러한 공간을 놓칠 리 없었다. 밑선에서 볼이 공유될 때 데 브루잉과 스털링, 사네는 상대의 라인 사이의 공간으로 들어갔고, 투레와 페르난지뉴가 패스를 할 기회가 찾아왔다면 즉시 이들을 향해 앞선으로 볼을 배급했다. 

하지만 그 후에 펼쳐진 이들의 문제점은 맨시티의 공격 라인과 마주한 아스널의 수비 라인이 대처를 잘했다는 것이었다. 맨시티가 상대 라인 사이에서 볼을 치면서 공격을 전개해나갈 때, 뒷선에서는 램지와 쟈카가 곧바로 내려오고 있었고 아스널의 수비 라인(백5)은 좁은 횡간격을 유지하며 아구에로에게 배급될 스루 패스 공간을 철저히 차단했다.

그렇다 보니 라인 사이에서 볼을 받고 공격을 이어나가는 맨시티 선수 입장에선 측면을 택하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선수들이 밀집된 중앙으로 공격을 전개하기에는 확률도 낮고, 조금만 더 시간을 끌었다간 뒷선 램지와 쟈카의 압박이 바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과르디올라가 이번에도 윙어 나바스를 윙백으로 둔 만큼 오버래핑의 공격력도 원했을 것이다.  



아스널의 매우 조밀한 5-4-1 수비 진영


맨시티의 공격이 제대로 펼쳐지지 않은 시점이 바로 그 다음부터였다. 측면 자원이 사이드에서 볼을 잡을 경우,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은 크게 2가지였다. 첫째는 컷백을 치든 얼리 크로스를 올리든 박스 안으로 볼을 배급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밑 공격 2선 하프 스페이스에 위치한 데 브루잉이나 스털링, 사네에게 다시 볼을 돌려주는 것이었다.

전자를 선택할 경우 맨시티에는 크로스를 골로 연결시켜줄 마땅한 공격수가 없었다. 맨시티의 공격 라인이 뛰어난 위치 선정으로 땅볼 크로스를 받아내기엔 아스널의 전문 센터백이 3명이었고, 높은 크로스가 올라올 때는 신장이 따라주지 못했다. 이날 맨시티는 총 30번의 크로스를 시도했다. 동시에 아스널의 센터백들은 18번의 클리어링을 해냈다.

반면 후자를 선택할 때는 아스널이 위 그림과 같이 매우 조밀한 5-4-1 수비 진영을 형성했다. 이것이 벵거가 이번 경기 자신의 철학을 버리고 백3를 선택한 결과였다. 아스널의 수비 진영은 매우 탄탄하고 유기적이었다. 잘 조직된 채로 좌우를 오갔으며, 맨시티의 페너트레이션 단계를 끝까지 막아냈다. 이들은 절대 무리한 압박을 가하지 않았다. 맨시티의 실수를 천천히 유발했고, 이들이 측면으로 전개한 후 박스 안으로 크로스를 올리기만을 기다렸다. 때문에 맨시티 입장에서도 아스널의 코너킥 단계에서 곧장 이어진 볼을 수비 뒷공간 역습으로 득점하는 것이 최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스널 공격의 핵심은 크로스와 세트피스

이날 아스널이 노린 공격의 핵심은 크로스와 세트피스였다. 전술했듯 이번 경기에서는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택한 벵거였던지라 역습 위험이 큰 공격 단계를 그리 오래 끌고 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공격은 박스 안에 위치한 타겟형 스트라이커 지루를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온전히 그의 머리만을 노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가적으로 따르는게 세트피스였다. 아스널은 지난 맨시티와의 리그 홈경기에서 2골 모두를 세트피스로 성공시킨 전례가 있다. 

아스널의 이번 경기 공격 진영과 형태


아스널의 이번 경기 공격 진영과 형태는 위와 같았다. 우선 기본적으로 백3의 모든 수비수들에게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을 것을 주문했다. 맨시티의 역습에 대한 대처였다. 그리고 외질과 산체스는 기본적으로 측면에 위치하되, 이들이 볼을 잡거나 오프 더 볼 움직임을 위해서라면 중앙으로 좁혔다. 이와 동시에 양 윙백이 오버래핑을 시도했는데, 이는 오른쪽 외질-챔벌레인 라인에서 매우 활발하게 이뤄졌다. 최전방 스트라이커 지루는 항시 박스 안에서 크로스를 노리고 있되, 때에 따라서 포스트 플레이를 위해 유기적으로 밑선에 내려왔다. 그리고 중앙 미드필더 램지는 계속해서 공격 라인으로 쇄도했다. 실제로 경기 후 벵거가 램지에 대해 '램지는 램파드와 비슷한 유형의 선수'라고 언급하기도 했으며, 우리는 몬레알의 첫 번째 골 장면이 지루와 램지가 박스 안에서 시선을 끌어주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란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측면에서 이뤄지는 윙어-윙백 간의 유기적 움직임으로 크로스가 가능한 여유 공간을 만들고, 그 후 박스 안으로 크로스를 연결하여 지루가 메인 타겟터가 되고 램지가 세컨볼을 노렸다. 이날 아스널은 총 21번의 크로스를 올렸다. 이는 맨시티 30번과 비교하자면 낮은 수치지만, 이날 아스널이 34.5%만의 점유율을 가져갔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된다.   



오른쪽 공격 라인인 외질과 챔벌레인의 패스맵 (c)whoscored.com



이번 경기 아스널과 맨시티의 공중볼 경합 성공 지역 (c)whoscored.com


그리고 또다른 공격 전략은 세트피스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전술했듯 이번 경기 벵거는 상대 진영에서 지속되는 공격 단계를 원하지 않았기에, 맨시티 수비진들에게 그들의 수비 단계에서 나오는 파울을 만들어내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이들의 디펜드 써드 지역에서 반대편 파이널 써드 지역까지 한번에 연결되는 롱 볼을 노리는 것이었다. 아스널의 최전방에는 미리 위치를 선점하고 굳건히 서있을 수 있는 힘이 좋은 공격수 산체스와 지루가 있었다. 지루는 수비수를 등에 지며 공중볼을 따낼 수 있고, 산체스는 미리 좋은 위치를 선점하여 상대 수비수와의 힘싸움에서 밀리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외질에게는 여유만 된다면 어느 공중볼이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뛰어난 트래핑 능력이 있었다. 

수비진에서 연결되는 롱 볼로 맨시티 수비수들이 자신들의 진영에서 파울을 유도하도록 만든 것이다. 비록 실제로 이를 통한 세트피스 기회를 많이 만들어내진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벵거는 '골을 넣어야 하는 방법'을 틀리게 짚지 않았다. 전술했듯 아스널의 첫 번째 골은 챔벌레인의 크로스에 의한 몬레알의 슈팅으로 성공됐고(동시에 지루와 램지가 박스 안에서 상대 수비 시선을 끌어줌), 역전을 만들어낸 득점은 결국 세트피스에서 나왔다. 연장전 10분은 벵거의 노림수가 적중하는 순간이었다.


벵거와 펩. 무관을 하면 정말 어려운 시즌으로 남게 될 이 두 명장의 싸움은 노장 벵거가 승리를 거뒀다. 현실을 직시한 그의 선택, 그리고 연륜에서 파생된 경험이 만들어낸 승리였다. 이들은 맨시티와 리그 최강 첼시를 꺾으며 2년 전의 영광을 재현하려 하고 있다. 위기의 벵거는 FA컵 우승으로 팬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돌릴 수 있을까? 그의 커리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위대한 도전이 다시 시작됐다.